[2018.11.15] 2018 아티스트 | 김길후 슬픔은 더 깊은 슬픔으로 치유되어야한다-nfpeople.com

 

아티스트 | 김길후 슬픔은 더 깊은 슬픔으로 치유되어야 한다

稿源(원고):南方人物周刊(남방인물주간) | 作者(저자): 本刊?者 ?郁(본지 기자 등욱) | 日期(날짜): 2018-11-15

 

"그동안 상실감이 납덩이처럼 느껴져 숨이 막혔다.한 관객이 '자살려고 했는데 작품을 보고 나니까 나보다 더 힘든 사람이 있었구나, 그래서 다시 살아날 수 있는 희망을 찾았다'고 알려줬다. 내 그림이 어둠 속에서 그에게 희망의 한 줄기 빛을 선사했다!" 

 

 

 한국 예술가 김길후가 40년 동안 작업한 것을 빗대어 보면, 연민과 따뜻한 마음을 가진 화자가 자신과 여러 세대가 느끼는 분노와 두려움, 억압과 노역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살펴 작품에 담아 중년 이후 화해와 전환을 시도하고 있다. 

 

 "검은색은 내 마음이 무너진 폐허와 같다는 것을 상징한다" 


 흐릿한 사람 상 하나하나가, 까맣게 뒤엉켜 있다.굽이굽이 흐르는 공간, 땀, 눈물, 피가 화지 가장자리에 흐르는 듯했다.


 텅 빈 환경을 향해 공허한 눈빛을 던지며 호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거나, 목이 손에 졸려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거나, 감옥 같은 지대에 갇혀서 도망갈 길이 없어….


 김길후는 2001~2004년 작업한 '검은 눈물'을 벽으로 가리키며 그가 가장 사랑하는 개인 시리즈임을 알려줬다. 그의 눈에 비친 종이는 스펀지 같기도 하고 강철 같기도 하다.


 이 시리즈가 시작되는 단계에서 종이는 한 폭 가득 쌓여 무겁고 빽빽한 검은 끝없이, 아무런 생명 특징도 없이 모든 것을 집어삼킬 수 있는 심연이다.


 철·은·동·녹·진주가루를 섞은 콜로이드로 천에 수없이 덧칠해 검은색이나 회흑색 표면을 만들곤 했던 그의 마지막 아련함과 우울한 분위기는 작품 표면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예술가의 심리적 심층에서 비롯됐다.


 "검은색은 내 마음이 무너진 폐허와 같다는 것을 상징한다.그동안 상실감이 납덩이처럼 밀려와 숨이 막혔다.한 관객이 나에게 말했다. '자살하고 싶었는데 당신의 작품을 보고 나니 그림 속에 나보다 더 힘든 사람이 있었구나. 그래서 다시 살아날 수 있는 희망을 되찾았다.' 나의 그림이 뜻밖에도 어둠 속에서 그에게 희망의 서광을 가져다 주었다!슬픔은 더 깊은 슬픔으로 치유되어야 할 것 같다.평화롭고 고도로 문명화된 사회에서 처참함을 느끼는 사람이 이토록 많다는 것을 알게 됐다."감개무량하다.

 


Black Tears Paper Synthesis Acrylic and Ink 2000 


 어느 날 불탄 숯을 들고 그림을 그리며 붓을 휘둘렀다.화면 속 인물들의 모습은 흐릿했고, 동작은 천태만상이었지만 뒤틀리고 찌그러져 있었고, 졸음과 절망이 종이 등을 꿰뚫고 있었다. 

 


 

 김길후는 미리 계획한 적이 없다.물감이 마르기 전에 그는 어둠 속을 헤집고 뒹구는 것처럼 마음속에 품고 있던 생각을 잽싸게 발랐다.송장에 있는 그의 조선족 화가 박광섭은 "김길후가 그림을 그리는 방식이 폭력적이었다"고 했다.그는 결코 부인하지 않는다. 

 


 

"나는 절대 점잖지 않게 그림을 그린다.과감하고 재빠르게, 주저하지 않고, 섬광처럼 그린다.펜 대신 망치와 칼, 날카로운 물건으로 그림 표면을 긁어 상처를 내곤 했다.구경꾼들은 내가 그림을 그리는 것도 운다"고 말했다. 

 

 

 

 

 


 미소 소년의 귀환

 김길후는 '검은 눈물' 시리즈를 집필한 뒤 비관주의와 허무주의자로 몰리면서 스스로 "4년이 넘는 깊은 고통으로 검은 눈물 시리즈를 완성했다.그리고 나는 뒤를 돌아보며 나의 아름다운 시절은 언제였느냐고 물었다.

 그는 부모님과 자신의 집 화원을 떠올렸다. 아버지는 독서와 서예를 좋아했고 어머니는 한국 여성으로 원예에 관심이 많았다.부산의 기독교당과 불교사찰이 공존하는 동네에 큰 감나무 아래 아이리스, 튤립 등 천국 같은 정원이 있었다.미인초, 다려화, 완두, 제비꽃, 쥐꼬리풀, 그리고 그의 작품에 반복된 백합은 차차 피어나고, 향기가 자욱하다.

 방과 후 꽃가게에서 해가 질 때까지 머물곤 했다."달이 있는 날에는 화초를 가꾸고, 비가 오면 우산을 써서 비를 피하고, 해가 너무 강렬하면 양산으로 가려줍니다.개구리를 애완동물로 삼는다. 이른 봄, 흙을 펼쳐서 있는 것을 본다.씨앗도 없이 푸르러. 부러진 어린 싹을 보면 좋아살을 도려내는 듯한 아픔"이라고 말했다.

 부모는 그가 무엇을 하려 해도 제지하거나 꾸짖지 않는다.그들이 내게 가장 많이 하는 말은, 잘 하고 있다는 것이다.

 "내 삶도 그렇게 밝고 풍요로웠구나."그는 기억창고의 반짝이던 순진한 시절들을 '시크릿 가든' 시리즈에 넣었다.

 

 

 

 백합을 즐겨 그린다. 백합이 심미안을 키운다."가장 큰 백합은 1.5m 높이까지 자란다.줄기가 자라나자 연두색 비닐봉지가 터질 듯했다.시들면 백합이 '탁' 소리를 내며 꽃송이가 떨어지고 줄기만 남는다.꽃이 떨어지면 암술만 남고 깔끔하고 꾸밈이 없다"고 말했다.

 백합은 김길후에게 도발적인 욕망의 대상이자 진정한 자아였다. "그때 그림이 내 이상형이었는데 도와주지 않았다.그리고 가시 돋친 꽃은 상처를 준다. 그것이 사랑이다.사랑은 포용이다." 백합의 구줄기를 들고 검은 물에 몸을 담그는 그림도 있다.

 우홍 관장은 사실 '검은 눈물' 후반기에 김길후는 간단한 비판도 정치쇼처럼 고난에서 벗어나 시간과 사회의 한계를 뛰어넘어 좀 더 폭넓은 삶의 주제를 다시 조명해야 한다는 것을 자각했고, 어린 시절부터 사랑했던 '고도를 기다리며'에 나오는 것처럼 '희망이 없는 곳에서 희망을 기다린다'고 말했다.'시크릿가든' 시리즈가 그 시작이었다.

 

 

스스로 파괴하다 

 30대를 전후해 예술가의 직업으로 생업이 어려워 앞길이 불투명해지자 김길후는 절에 들어가 사색을 하기도 했다.열매를 맺지 못하고 산을 내려가 채소를 팔고 날품팔이로 끼니를 때웠다. 서른셋이 되어서야 예술의 길을 갈 것을 굳게 결심하였다.

 1999년에는 종전 작품 1만6000점을 불사르기도 했다. "예술적으로 김길후는 '한 번 죽은' 사람이다."우훙은 1980년대 전후로 한국에는 주류 이데올로기를 구현한 관영 미술이 있었고, 관영에 의해 암묵적으로 인정받거나 지지받았다고 소개했다.단색화 운동.오늘날, 일부 단색화는 기예를 대표한다.미술가의 작품은 자본의 운영으로 시장 경매가 최고가를 기록했다.이와 함께 김길후를 비롯한 '분노의 세대' 예술가들의 항쟁의식을 담은 '민중예술'은 '지하미술'로 등장할 수밖에 없다. 김길후는 2000년 첫 시리즈 '검은 눈물'을 예술 풍격의 탈바꿈으로 볼 수 없고, 자신의 내면에 거대한 '정신적 블랙홀'과 싸우고 있다.

 이후 '시크릿가든' '영웅' '현철' 등의 시리즈를 썼다.블랙 베이스에는 희망과 믿음을 상징하는 골드&실버 화이트가 들어갔다. 주제도 순수자아에서 뛴다.출, 자아, 타자, 사회, 자연, 만 속으로사물의 다양한 관계, 명제 사이의 조명. 김길후는 5m 높이의 신작 '모와 자'를 3시간 반 만에 완성했다.황무지 위에서 타이탄처럼 거대한 어머니의 몸이 뒤로 젖혀져 모든 것을 다 해내는 듯했다. 손이 작은 아기를 힘껏 떨어뜨리지 않는다. 같은 시리즈인 '부녀'에서 딸은 나무 아래에서 아버지가 검은 나무에 오르는 것을 지켜보며 한사코 붙잡는다.덩굴. "처음 인류는 나무에서 그들(식물)과 함께 살았다."그가 말했다.

 그의 행위예술 작품 속 백지상자에는 나비, 새가 그려져 있다.김길후는 지구의 주인이 식물이라고 생각한다."그것들의 진화는 완전히 성공한 것이지, 곤충과 경쟁하는 것이 아니다.경쟁은 인류를 멸종시킬지도 모른다.식물과 다른 생물은 공존하지 않는다"고 말했다.개막식에서, 그는 구부러진 모퉁이를 그렸다.꼬불꼬불하고 종이상자 위를 헤엄치는 긴 줄이 식물처럼 무턱대고 자라는 것은 우리가 어디서 왔고, 결국 어디로 가야 하는 것인가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졌으면 좋겠다.

고행과 환생

 잉크를 묻혀 손에 브러시를 들고 백지상자 너머로 수십 미터 떨어진 곳에 이르기까지 김길후는 아무 말 없이 미소를 지었다. 이어 솔을 들고 검은색과 금색 물감을 몸에 두르고 주위를 둘러보며 웃는 모습이 친근한 옆집 아저씨 같았다. 예술이 끝나자 군중들은 흩어지고 반바지 차림의 김길후는 텅 빈 전시장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두 손을 모은 채 여전히 옅은근히 웃는다. 나도 모르게 미소라는 그의 별명이 떠올랐다.

 


 

초등학교 3학년 어느 날 김길후가 친구들과 수업시간에 이야기를 나누자 선생님이 조용히 하라고 하셨다.그는 겸연쩍어 선생님께 웃었다.선생님은 김길후가 장난스럽게 생각했다. "네가 왜 나한테 웃어?" "걸음을 내딛어 계척으로 벌을 주라고 했지만 나는 웃었다.내 얼굴이 통증으로 찌그러지면 선생님께서 체벌로 후회하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래서 나는 계속 선생님께 미소를 지었다.하지만 그는 나를 오해했다"고 말했다.어머니는 학교로 불려갔고, 김길후는 '미소'라는 별명을 얻었다. "한국은 이 세상에 태어나면 좋은 시대가 와야 한다는 옛말이 있다."김길후는 웃으며 말했다. "마음에 선의(善意)가 있어야 세상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인가요?" 그래, 먼저 사랑받아야 사랑을 느낄 수 있다.그가 대답했다. 

 열한 살, 어머니는 아침 4시에 절에 데리고 가서 주지 고쟁을 쳤는데, 듣자니 마음이 편해져서 매일 갔다.깊은 겨울의 우물이 칼로 베일 듯이 차서 그는 손을 씻고 세수를 하며 조금도 소홀히 하지 않는다.김길후는 이제부터 불문에 들어간다.

 박광섭은 "송장에 함께 있지만 김길후 작업실에 들어가기가 쉽지 않다"고 했다.한동안 가지 않자 신작들이 안방에 가득 깔렸다.밤낮없이 그린다"고 말했다.

 송좡(宋某)의 한 화랑 2층에 있는 큰집. 김길후(金的家:)의 집. 한쪽은 그림과 물감, 다른 한쪽은 밧줄 4개에 얇은 모기장을 매어 1인용 침대 천장에 가린 채 8년간 잠들어 있었다.바닥에 옷 두세 벌이 싸인 종이 봉지와 생수통 열 개, 밥솥과 유리 찻잔, 어수선한 책도첩이 그의 전부였다.사흘 전 김길후 씨의 형이 병문안을 왔다가 마음이 아파 동생의 새 이불을 사줬다.

 그는 선반 위의 7cm×10cm짜리 작은 그림 한 장을 보여주며 "그래도 검은 바탕에 자태가 만발한 사람"이라며 "손가락으로 팠던 하얀 자국이 있지만 거리 풍경과 꽃이 많아졌다"고 말했다.김길후는 "'캔버스 뒤의 자화상'이라는 시리즈로 현재 송장의 생활상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고 말했다.두 번 만난 사이 20일 동안 그는 400점 등 모두 3000점을 그렸다.

 

 

 

 "한국에 독립된 작업실도 있고 개인 예술관도 있으니 이렇게 엉망으로 살지 않아도 된다.하지만 물질적으로는 최소한의 욕구만 충족시키면 된다고 고집했고, 식사는 흰 쌀밥에 소금만 시켜놓고 차를 마셨다"고 말했다.오홍은 1년 전 김길후를 알게 된 것이 바로 이 열정과 그림 속 심성이 그를 움직였다고 했다.

 심혈을 기울인 그림을 망가뜨리고 고행승 같은 상태로 살아가는 김길후는 과거와는 결별해야 새로움을 창조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을 운명의 절벽 위에 올려놓는 극단적 행위다. 내면의 불성과 오래도록 쌓인 울분과 아직 가시지 않은 정서가 어떻게 공존할 수 있을까. "네, 오랫동안 저를 꼬이게 했던 문제입니다.풀리고 싶다"고 말했다.오늘날까지도 그 '마성'이 꼬맹이처럼 불쑥 튀어나온다고 한다. 예를 들면 꿈에서는 도저히 갈 수 없는 곳으로 달려가고, 현실에서는 겸손한 줄 알면서도 짜증을 내며 우왕좌왕하는 것이다.

 그는 5년 전 한국에서 중국 티베트 출신의 활불(活佛)을 만났다.활불은 돈황의 한 당나라 화공이 팔대산(八大山) 사람의 전신이며, 그의 후손이 한국에 나타날 것이라고 김길후(金煦煦)라고 알려줬다."당신이 바로 그 김길후입니다."김동기 대신 김길후로 이름을 바꿨다.만났을 때 그는 한번씩 되풀이하였다.전시장, 그림책의 본명인 김동기를 머그펜으로 칠한 뒤 '김길후'라고 정성껏 적었다. "이제야 사상과 창작이 무르익어 가는데 옛사람들로부터 정신적 안내를 받아 이름을 바꾸고 또 한 번 발길을 돌려야 합니까?"나는 그에게 물었다.

 "이름을 바꿨는데 너무 좋다.(그때 나는) 53세였다.나를 아는 사람들이 모두 나를 잊었으면 좋겠고, 언젠가는 '비참한' 주인공이 되고 싶다.아무도 나를 모른다. 하지만 나는 윤회에서 다시 살아날 것이다.마치 지금 한국의 친구들도 나의 베이징 생활을 모르고 있는 것 같다.내일 정오에 다시 대구로 날아갈 겁니다.온통 녹색으로 뒤덮인 분지 속의 도시에서 74세에서 84세의 오랜 친구들과 차를 마시며 식사를 한다.그리고 나서 그림을 그리세요.너도 알다시피 나는 그림을 그리는 중독자이다. 나는 마치 위챗 쪽을 보는 듯 그는 교활하고 천진난만하게 웃었다. (참고 자료: '존재와 허무: 한국예술가 김길후 작품전') (현장 한국어 번역: 박광섭 본문 기여: 육민추 인턴 기자)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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